정보의 홍수와 미디엄의 탄생 (3) 가능성은 방향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2026년,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AI가 코드를 쓰고, 디자인을 하고, 마케팅을 자동화하고, 콘텐츠를 발행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고객을 응대한다. 1년 전까지 팀이 필요했던 일을 혼자서 한다. 반년 전까지 한 달이 걸리던 것을 하루에 끝낸다. 모든 것의 저점이 올라갔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발행할 수 있고, 누구나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 속도만큼, 효과가 없다는 것도 빠르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이전트를 세팅했다. 돌아간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콘텐츠를 발행했다. 퀄리티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퍼널을 만들었다. 완벽하다. 그런데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같은 도구로 같은 구조를 짓고 있으니까. 저점이 올라간 만큼, 그 위에 서는 것만으로는 어디에도 닿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뭘 더 해야 하지?”

질문이 잘못되었다. 더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인간 정체성의 좌표가 한 칸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전 시대에 사람이 풀어야 했던 질문은 이거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나를 표현할 것인가.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 삶을 표현하고, 자기다운 것을 만드는 것. 그것이 개인의 과업이었고,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을 한다고 믿었다. 10년간 퍼스널 브랜딩의 대유행이 이 집단 믿음의 증거다.

AI 시대에 그 질문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자기표현은 쉬워졌다. 자기다운 콘텐츠도 만들 수 있다. 브랜딩, 톤, 비주얼, 상세페이지, 퍼널까지 AI가 도와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디어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들어진 자기들이 시스템 안에서 서로 닿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를 표현했다. 세상이 반응하지 않는다. 자기다운 것을 만들었다. 시스템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는지는 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과 어떻게 물려 있는지는 모른다. 자기 자신은 보이는데, 자기 자신이 놓인 좌표는 안 보인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인식은 한 칸 앞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누구인가”는 이제 시작점도 안 된다.

“나라는 존재가 이 시스템 안에서 무엇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이것이 이 시대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자아에서 위상으로. 정의에서 좌표로. 존재에서 관계로.

AI는 이 이동을 매우 빠르게 드러낸다. 도구의 힘이 커질수록, 도구를 쓰는 사람의 상태가 먼저 노출된다. 좌표 없이 에이전트를 돌리면, 에이전트가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표류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자동화가 아니라 자동 표류. 그리고 그 표류의 결과물들이 지금 이 생태계를 부풀리고 있다.

모두가 자동화를 팔고 있다. 자동화의 자동화를 팔고 있다. 그 사이 정보 생태계는 부풀고, 사람들의 의식과 집중력은 희박해지고 있다. FOMO를 느낄 새도 없이 무감각해지거나,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계속 같은 자리를 보고 있다. 몇 년 전, 향수 출시를 위해 시장조사를 나갔을 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수많은 물량과 인파, 그 안에서 유통되는 제품들. 대형 코스메틱 회사, 니치 브랜드, 유명 브랜드를 모방한 패키지에 약간의 라벨 등의 변화만 주고 출시한 수많은 작은 브랜드들을 계속 봤다.

향수는 후각신경에 직접 작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증을 받았다 해도, 신체에 부하만 가중시키는 제품들도 있었다. 그런 제품들을 수백, 수천개를 계속 보았다. 자기 생존 가치, 정체성과 취향의 증명, 그것으로 인정받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

그것은 향수 브랜드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체 시장이 점점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표현은 시장 자본의 흐름을 타고 퍼진다. 하지만 그 표현의 상호작용이 서로의 삶에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내 것이 왜 팔려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팔아야 하고, 왜 사야 할지 모르지만 소비는 해야 할 때, 미감과 감도라는 말을 썼다. 소비는 계속되어야 했고, 그 소비가 자기 정체성처럼 보이려면 그럴듯한 언어가 필요했다.

그 후로 나는 계속 체크했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주는 것인가? 자기표현과 취향 과시, 자기 사랑은 혼자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넌, 어떤 가치가 있지?

이런 관점에서 주간 300개의 콘텐츠를 발행하고, 효과를 보지 못한 콘텐츠, 거기에 들어간 비용들, 아카이브에 쌓이는 어마어마한 파일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하나하나가 소중해졌다.

메시지 하나가 사람의 의식에 닿으려면 무엇이 갖춰져야 하는지. 양이 영토를 만들되, 그 영토가 사람을 자기 자리로 데려다줄 수 있으려면 어떤 구조가 필요한지. 하루의 생체리듬, 한 주의 사이클, 절기와 시대 분위기. 각 환경과 감정에 최적화된 가이드를 AI가 만들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의 가치와 효과를 시뮬레이션하고 내가 먼저 실험해 보곤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가치와 자본을 주고받는 흐름 속에서, 내게 할당된 자리가 보였고 나는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선한 의도나 불필요한 믿음을 가지지도 않았고, 실제 효과를 내는 방법에 집중했다. 고민은 사라지고, 시야는 선명해지고, 선택은 명료해졌다.

인류 전체가 지금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느냐는 질문은 이미 낡았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AI가 인프라가 된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의 다음 칸,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칸으로 이동하지 않은 채 도구만 붙이면, 도구가 좋아질수록 더 길을 잃는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사람은 더 쉽게 길을 잃는다. 가능성은 방향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서 있는 곳을 느끼면, 내가 누구인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게 된다.

정보의 홍수와 미디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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