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표를 앞둔 저녁이다. 슬라이드를 마지막으로 다듬는데, 손이 자꾸 나를 돋보이게 하는 쪽으로 간다. 내 이름을 더 크게, 내 성과를 앞줄에. 누가 볼까, 몇 명이나 볼까. 정작 이 발표로 누구에게 무엇이 닿을지는 생각에서 밀려나 있다. 조명이 켜지자, 그 빛으로 나부터 비추고 싶어진다.
이번 주 메인 행성은 목성, 6번째 페이즈의 수호성이다. 이번 주는 무대에 올라 판을 여는 자, 아스파시아의 주간이다. 그림자 자리에는 나르키소스가 서 있다. 조명을 자기 얼굴 비추는 거울로 쓰는 원형.

NICOLAS ANDRÉ MONSIAUX. Socrates and Alcibiades at Aspasia.
무대의 빛은 무대 위에 연료를 주입할 때 오래간다
아스파시아는 고대 아테네에서 살롱을 연 사람이다. 여자에게 광장의 연단이 닫혀 있던 시대에, 그는 자기 집에 도시의 지성을 불러 모았다. 페리클레스가 그의 곁에서 연설을 다듬었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방에서 말을 배웠다고 전한다. 아스파시아는 무대 정중앙에 혼자 서지 않았다. 사람을 모아 세우고, 그들의 말이 도시의 방향이 되게 했다.
여기서 이번 주의 반전이 나온다. 혼자 빛나려는 손과, 새 판으로 튀려는 손은 같은 손이다. 둘 다 지금 이 무대에서 실제로 하나를 보여주는 게 무서워서 나온다. 혼자 뽐내면 평가를 피할 수 있고, 새 분야로 옮기면 미완을 남겨둘 수 있다. 아스파시아가 아는 건 이거다. 무대의 빛은 내가 누구를 세울 때 오래간다. 나를 크게 만드는 데 다 쓰면, 그 빛은 그 밤에 꺼진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불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무대에 연료를 주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Echo and Narcissus (1903) by John William Waterhouse
같은 조명 아래, 나르키소스와 아스파시아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붙들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조명이 켜지면 우리 안의 나르키소스가 먼저 깨어난다. 좋아요를 세고, 누가 봤는지 확인하고, 내가 얼마나 특별해 보이는지에 하루를 쓴다. 빛은 나를 향하는데, 정작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나가지 않는다. 아스파시아와 나르키소스는 같은 조명 아래 서 있다. 갈리는 건 그 빛을 어디로 돌리느냐 하나다.

하늘은 빛을 비추어 줄 뿐
목성과 명왕성이 이번 주 정면으로 마주 본다. 크게 벌이고 싶은 마음과, 지금 벌인 걸 끝내라는 압력이 가슴 한가운데서 같이 뛴다. 사자의 계절이라 그 떨림은 심장께에 모인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두근거림, 드러남의 긴장이 몸으로 온다. 하늘의 몫은 여기까지다. 빛을 켜 주는 것까지가 하늘이고, 그 빛을 어디에 비출지는 네 손에 남는다.
그 두근거림을 가라앉히는 길은 조명을 끄는 게 아니다. 방향을 트는 것이다. 만인을 향하던 빛을 딱 한 사람에게 돌린다. 아스파시아가 광장 대신 방 하나를 택한 것과 같다. 무대를 넓히는 대신, 그 무대에서 한 사람에게 실제로 닿는 걸 하나 만든다. 확장하려던 힘은 그렇게 연결로 내려앉는다.
이번 주 한 수
이번 주 포르투나 프로토콜은 아스파시아 주파수 명상, 639Hz다. 639Hz는 연결의 소리다. 눈을 감고 3분, 이 소리 하나에 집중한다. 그리고 딱 한 사람을 떠올린다. 이번 주 내가 만든 것 하나를 보여주고 싶은 그 한 명이다. 명상이 끝나면 그 하나를 실제로 그 사람에게 보낸다. 그게 이번 주의 가장 작은 실행이다.
발표를 앞두고 나부터 비추고 싶던 그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슬라이드를 나를 크게 만드는 쪽에서, 그 한 사람에게 닿는 쪽으로 고친다. 혼자 빛나려던 조명을 한 사람에게 비춘 자리에, 판이 열린다. 아스파시아의 무대는 늘 그렇게 시작됐다.
포르투나 프로토콜은 매주 하나의 신화적 페르소나로 그 주의 하늘을 읽고, 몸으로 내려 실행 한 수로 옮긴다. 점성 데이터는 방향을 가리킬 뿐, 빛을 어디에 비출지는 언제나 당신의 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