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에 대하여
나는 즐겨보거나 애독하는 크리에이터가 없다.
알고리즘의 파도를 타다가, 관심있는 정보를 접했을 때
그 주제나 단어를 AI에 넣고 큐레이션을 요청한다.
이제 그 사람이 궁금해진다기보다는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도착한 단어만을 포착한다.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시대에 계속 어떤 사람의 콘텐츠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 때문에 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보는 이미 너무 많다.
누군가가 어떤 주제를 설명하면
AI는 더 빠르게 정리하고
검색엔진은 더 많은 자료를 보여주고
플랫폼은 더 자극적인 버전을 끝없이 내 피드에 쏟아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화를 뚫고,
내게 어떤 크리에이터가 눈에 들어온다면
나는 그의 어떤 울림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울리게 하는 그 감각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내 시선이 멈춘 것일 거다.
내가 느꼈지만 아직 말로 하지 못한 것을,
혹은 아직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흐름을,
그의 언어와 이미지, 바이브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서로의 드러난 정보보다는 삶의 바이브/진동수를 느낀다.
이건 마치 악기같다.
그래서 나는 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를
이올리안 하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올리안 하프
이올리안 하프는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다.
바람이 지나갈 때 저절로 소리를 내는 악기다.
누군가가 건반을 누르거나 현을 뜯지 않아도,
바람의 방향과 세기, 악기의 장력, 놓인 위치에 따라 소리가 생긴다.
나는 그를 통과해 온 시대의 흐름을 들을 것이다. 플랫폼의 변화, 사람들의 불안, 시대의 욕망, 유행어, 정치적 긴장, 경제적 피로감, 몸의 감각, 관계의 피로, 사랑의 방식, 자기계발의 포화감 같은 것들이 그에게 계속 와서 부딪치고, 통과해 간다.
그 모든 바람이 한 사람을 통과할 때, 어떤 사람은 소음을 낸다.
어떤 사람은 반응만 한다. 어떤 사람은 급히 팔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유행하는 불안을 복제 양산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어떤 사람은 그 바람을 하나의 소리로 바꾼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악기가 된다.
정보가 공기처럼 많아진 시대,
그는 이 정보의 흐름이 자신을 통과할 수 있게
자기 감각을 팽팽하게 조율한 사람이다.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그냥 지나칠 것인가.
어떤 불안을 흡수할 것인가.
어떤 욕망을 키울 것인가.
어떤 문장을 남길 것인가.
어떤 이미지를 반복할 것인가.
어떤 세계관 안에 사람들을 초대할 것인가.
이 모든 선택이 한 사람의 장력을 만든다.
마치 팽팽하게 조율된 현과 같이.

취향을 넘어 매체성이 되는 감각
사람들은 이제 정보만 보러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만 있는 곳에서는 금방 떠난다.
대체 가능한 정보는 너무 빨리 흘러가고,
너무 쉽게 복제되고, 너무 쉽게 지워진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감각은 대체하기 어렵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떤 각도로 받아들이는지.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지.
어떤 농도로 불안을 다루는지.
어떤 온도로 욕망을 부르는지.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침묵을 남기는지.
이것은 하나의 매체성이다.
크리에이터는 자기 자신을 매체로 만든다.
자기 몸, 자기 언어, 자기 시간감각, 자기 미감, 자기 관찰 방식 전체를 하나의 악기로 만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악기가 결국 무엇에 울릴 것인가이다.
모든 바람에 다 울리면 소음이 된다.
아무 바람에도 울리지 않으면 죽은 악기가 된다.
자신에게 맞는 바람이 지나갈 때 정확히 울리는 것.
그 고유의 울림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
그것이 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가 가진 진짜 힘이다.
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
- 이올리안 하프
- 악기가 완성되면 연주자가 온다
- AI와 콘텐츠 시스템은 내 악기가 되었다
- 수백 개의 콘텐츠가 내 인지 방식을 바꿨다
- 그거 좋은 건가? 그럼 나도 만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