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걸 누가 알려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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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값을 다 갚은 날이었다. 앱을 열어보니 0원이 찍혀 있었다. 몇 달을 끌고 다니던 숫자가 사라졌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날 저녁 편의점에서 4천원짜리 커피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머리 속 계산은 이미 끝났다고 말하는데 손은 그 통보를 아직 못 받았다는 듯 굴었다. 결국 물만 사서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끝났다는 걸 나는 대체 언제 믿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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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표는 지워졌는데 배는 안 돌아왔다

7월 13일,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해협에 가격표가 붙었다. 호르무즈를 지나는 화물에 가치의 20%를 물리겠다는 발표였다. 화주가 평소 내는 운임이 화물가의 2~3% 수준이니 열 배쯤 되는 숫자였고, 전시 보험료와 맞먹는 액수였다. 국제해사기구는 국제항행에 쓰이는 해협에 통항료를 물릴 법적 근거가 없다며 반대 성명을 냈다. 요금은 하루 만에 철회됐다. 그런데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주말 사흘간 해협을 지난 선박은 57척, 전주보다 절반 넘게 줄어든 채였다. 가격표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돈 뒤에도 통항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요금은 국가가 정하고 보험료는 보험사가 정한다. 선주가 돈을 낼 의사가 있어도 보험사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보장 자체를 거절한다. 국가는 자기가 매긴 가격표를 하루 만에 지울 수 있다. 남의 위험 판단은 지울 수 없다. 발표는 하루면 되돌아가는데, 그 발표를 보고 갱신된 수백 명의 계산은 각자의 속도로만 되돌아간다. 이 모든 게 합쳐져 만드는 오늘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면, 위험 잔류다. 위험 신호는 공식적으로 꺼졌는데 그 위험에 대비하던 상태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카드 앱의 0원과 커피 앞에서 멈춘 손 사이의 그 간격이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잘 말하지 않는 층이 하나 더 있다. 우리는 끝났다는 말을 누가 해주기를 기다린다. 위험의 시작은 뉴스가 알려주는데 끝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끝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산다. 게다가 경계에 머무는 데는 은근한 이득이 있다. 긴장하고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방심했다는 말은 안 듣는다. 위험 잔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슬쩍 붙잡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위협은 한 번에 배우고, 안전은 횟수로 배운다

신경계는 위협과 안전을 다른 속도로 배운다. 위협 학습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새겨진다. 안전 학습은 그 기억을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위에 “이번에도 괜찮았다”는 기록을 새로 덧쌓을 뿐이다. 원본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새 기록이 충분히 쌓일 때까지 원본이 계속 이긴다. 통보 한 번으로 안 풀리는 게 정상인 이유다.

포르투나의 눈으로 보면 이건 전부 확률 계산이다. 보험사는 그 계산을 숫자로 한다. 사고율, 재발률, 손해액. 우리는 같은 계산을 몸으로 한다. 다만 몸이 쓰는 확률표는 갱신이 느리고, 무엇보다 우리 대부분은 그 표를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 여기서 사람이 갈린다. 휩쓸리는 쪽은 남이 끝났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운용하는 쪽은 무엇을 보면 끝났다고 볼지를 미리 정해둔다. 엔진은 같다. 표를 누가 쥐느냐만 다르다.

오늘은 하늘도 같은 그림을 그린다. 이번 주 목성과 명왕성이 정면으로 마주 선다. 목성은 크게 벌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힘이고 명왕성은 통제와 되돌릴 수 없음을 다루는 힘이다. 괜찮다는 신호와 아직 안 풀렸다는 현실이 마주 보는 배치다. 주 초반은 게자리의 꼬리에 걸려 있는데, 게자리는 어디가 안전한가를 묻는 자리다. 그리고 7월 24일 수성이 방향을 되돌려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미뤄둔 확인을 재개하기에 이만한 날이 드물다. 환경도, 신경계도, 하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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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내가 확인하는 법

두 줄로 나눠 적는다. 공식적으로 끝난 것 한 줄, 아직 안 끝난 느낌 한 줄. 섞여 있으면 전부 자기 탓으로 수렴한다. 나눠 적는 순간 하나는 사실이 되고 하나는 상태가 된다. 상태는 탓할 대상이 없다.

해제 지표를 미리 정한다. 무엇을 보면 끝났다고 볼 것인가. 해협에는 통항량이라는 숫자가 있다. 카드값이라면 “3주 동안 커피를 사고도 잔고를 확인하지 않은 날” 같은 것 하나. 남의 통보 대신 내 관측치를 쓴다.

작게 여러 번 노출한다. 안전은 크게 한 번으로 안 쌓이고 작게 여러 번으로 쌓인다. 4천원짜리를 한 번 사보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 그게 확률표를 갱신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Q. 그럼 조심하는 게 잘못인가요?

위험 잔류는 고장처럼 보여도 실은 성능이다. 몸이 제대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다. 문제는 그 상태의 만료일을 누가 정하느냐 하나뿐이다.

Q. 해협 얘기가 왜 내 얘기인가요?

크기만 다르고 기계는 같다. 57척이라는 숫자는 선주 수백 명이 각자의 몸으로 내린 판단의 합계다. 통항량은 발표를 따라가지 않고 판단을 따라갔다.

위험은 통보로 시작하고 확인으로 끝난다. 시작은 남이 정하고, 끝은 내가 본다.

가격표는 하루 만에 지워졌고 배는 아직 안 돌아왔다. 그 사이의 시간이 이상한 게 아니다. 다만 그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통보를 기다리는 쪽보다 관측치를 정해둔 쪽이 먼저 안다. 혹시 지금 끝났는데도 안 끝난 것 같은 게 하나 있다면, 무엇을 보면 끝났다고 볼지 그 한 줄만 오늘 적어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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