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 (3) AI와 콘텐츠 시스템은 내 악기가 되었다

수백 개의 콘텐츠가 하나의 현이 될 때

예전에는 글을 썼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문단.
하나의 제목.
하나의 결론.

글을 배우거나 한 적은 없지만 나름 이 안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문장이 너무 무겁지는 않은지, 표현이 너무 흐리지는 않은지, 논지가 충분히 선명한지, 내가 그 사람들 안에 피워내려고 하는 감각이 살아 있는지 하나씩 들여다봤다.

그때의 글쓰기는 한 장의 종이에 가까웠다. 내 앞에는 하나의 글이 있었고, 나는 그 글을 깎고 다듬었다. 단어를 바꾸고, 순서를 옮기고, 문장의 온도를 조정했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그 글은 나름의 몸을 가졌다. 하지만 알고리즘 시대의 글은 그런 식으로 쓰이지만은 않는 것 같다.

이제 내 앞에는 인스타 피드 한 페이지가 있다.
주간에 올라갈 15개의 콘텐츠가 있다.
스레드와 엑스에 흘러갈 100개의 타래가 있다.
검수 중인 300개, 때로는 500개의 짧은 콘텐츠가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양이 엄청나다, 해야 할 일이 많다, 확인할 문장이 많다, 올려야 할 콘텐츠가 많은 상황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야가 달라졌다. 그 수백개의 콘텐츠가 하나의 펼쳐진 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게시물이 따로 놓인 독립된 조각을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무늬를 완성하는 하나의 표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인스타 피드 한 페이지는 캔버스가 되었다.
100개의 타래는 악기가 되었다.
수백 개의 콘텐츠는 각기 다른 장력으로 걸린 현이 되었다.

나는 이제 그 위에서 이미 펼쳐진 현들을 본다. 너무 튀는 단어를 낮추고, 흐려진 방향을 다시 세우고, 반복되어야 할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져야 할 잡음을 걷어낸다. 단어 하나를 바꾸면 전체의 울림이 달라진다. 실제 글을 읽지 않게 되었다. 펼쳐진 맥락을 스캔하고, 단어의 경중을 만져 필요한 곳에 재배치한다.

정보 과잉이라고 쓰면 설명이 된다.
정보독거미라고 쓰면 세계가 생긴다.

완성한 척하는 상태라고 쓰면 분석이 된다.
다된척벌레라고 쓰면 캐릭터가 생긴다.

혼란한 구간이라고 쓰면 상황이 된다.
안개평원이라고 쓰면 플레이어가 들어갈 장소가 생긴다.

같은 의미라도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콘텐츠는 정보가 되기도 하고, 세계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제 글 하나를 붙잡고 완성한다기보다 이번 주 전체가 어떤 감각으로 느껴지는지, 어떤 창이 열리는지를 계속 확인한다. 이번 주의 콘텐츠들이 전부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아래에서 같은 주제를 향해 흐르고 있는지 본다. 비전멘토스쿨, 포르투나 프로토콜, 페이트게임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본다.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이제 조율에 가까워졌다.

이 문장이 이번 주의 울림을 흐리는가.
이 단어가 브랜드의 기압을 바꾸는가.
이 캐릭터가 메시지를 너무 가볍게 만드는가.
이 설명은 너무 직접적인가.
이 이미지는 반복될 가치가 있는가.
이 콘텐츠는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가.

이 질문들이 믹싱 콘솔의 페이더와 노브처럼 내 앞에 한꺼번에 드러나는 순간, 나는 예전의 글을 쓰는 사람과는 다른 자리에 있었다.

장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

어렸을 때 대부분의 예술에 재능이 있었고, 대회나 공연에 불려다니곤 했지만 나는 예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청에서 주최한 그림 대회에 나가서 건물의 수많은 창을 채색하다가 문득 숨이 막혔다.

내 시간을, 에너지를, 왜 이딴 그림에 다 흘려붓는 거지?
그것도 나와 관련 없는 창문 같은 거나 그리면서.

이 질문을 까맣게 잊고 미대에 가긴 했지만 정확히는 외고에 갔다가, 고1 때 사인 그래프를 보자마자 예체능으로 전과했다, 이 질문은 내 삶의 중심에서 언제나 울리고 있다.

그럼, 내가 에너지를 써야 할 곳이 어디지?

그곳이 적어도 한땀한땀 단어나 색을 고르는 장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AI가 반가웠다. 가치있는 길을, 시간과 에너지 낭비 없이 갈 수 있게 해 준다. (라고 생각했지만 웹툰 한 컷 한 컷마다 손가락 손수 고치는 것은 비밀.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다.)

AI가 장을 펼치고, 나는 그 안에서 울림을 고른다

AI는 수백개의 문장들의 관계를 보면서 수백개의 초안을 빠른 시간에 뽑아내고, 표현의 가능성을 펼쳐놓는다. 사람하고 일을 진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지 않을까, AI가 일을 못해서 인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과 일을 할 때 소통과 조율에 낭비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난 언제나 이 시대에 감사하고 있다. 수백만개의 음원 샘플이 내장된 신디사이저가 주어져서 소리 샘플을 녹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당연히 감사한 일이다.

콘텐츠와 예술은 매개다. 재현이 아니다. 우리가 닿아야 할 곳은 콘텐츠를 통한 감각과 인식이지,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난 소리의 질보다 효과적인 전달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서 AI와 나는 음악의 두 측면, 악기와 연주자이다.
AI가 문장을 만든다면, 나는 장력을 본다.
AI가 장을 펼친다면, 나는 울림을 고른다.
AI가 여러 갈래의 말을 가져온다면, 나는 그중 어떤 말이 내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지 결정한다.

AI가 정보의 세계 속 바람을 자신의 안으로 담아오고, 난 그 바람을 만져 음악을 만든다.
이때 크리에이터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편집자이고, 발행인이며, 조율자가 된다.
글쓰기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생긴다.

이론은 멋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콘텐츠가 하나의 방향으로 들리게 만드는 일이다.
개별 문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 발행면이 같은 세계에 속해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글을 쓴다기보다 현을 만진다고 느낀다.

텐션을 조금 당기거나, 조금 늦추거나, 너무 날카로운 곳을 부드럽게 한다.
메시지가 너무 흐린 곳에는 정의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반복되어야 할 단어를 남기고, 사라져야 할 소음을 걷는다.
그렇게 펼쳐진 300개, 500개의 콘텐츠 위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서서히 선명해진다.

솔직히 이론은 멋진 것 같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이번 주 문명(?) 에는 어떤 스토리가 펼쳐지는가.
이번 주의 플레이어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이번 주의 몹은 무엇인가.
이번 주의 찜기 온도는…

알고리즘 시대의 크리에이터

  1. 수백 개의 콘텐츠가 내 인지 방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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